먹지 열 장에서 AI 한 줄까지
타자기·먹지로 문서를 만들던 1980년대부터 DOS 워드프로세서, 아래아한글, 전자결재를 거쳐 AI까지 변해온 문서 작성 도구를 회고하며, 도구는 가벼워졌어도 행정문서에 담기는 책임과 신중함은 그대로임을 짚은 공직자의 회고 에세이.
온몸으로 문서를 만들던 시절
1980년대 중반 군 검찰에서 복무하던 시절이었다. 내 앞에는 브라질제 한글 타자기 한 대가 놓여 있었다. 내가 맡은 일 가운데 하나는 공소장을 타이핑하는 일이었다. 먹지를 사이에 넣고 열 장 가까운 용지를 한꺼번에 끼운 뒤 타자기를 쳤다. 그것은 손끝이 아니라 온몸으로 문서를 완성하는 일이었다.
지금처럼 키보드를 가볍게 두드리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타자기의 키 하나를 누를 때마다 '철컥', '탁'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활자가 종이를 힘껏 때렸다. 먹지를 여러 장 겹쳐 놓았기 때문에 마지막 장까지 글씨가 선명하게 찍히려면 손끝이 아니라 손목까지 힘을 실어야 했다.
그 시절에는 타자를 잘 치는 것 자체가 하나의 기술이었다. 빠르게 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탈자를 내지 않는 것이었다. 공소장은 여러 부를 동시에 작성해야 했고, 한 글자만 잘못 쳐도 처음부터 다시 타이핑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문장을 먼저 머릿속에서 정리한 뒤 손가락을 움직이는 습관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었다.
빨간 글씨가 가득했던 결재판
1990년대 초 공직을 시작했을 때도 세상은 아직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타자기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고, 컴퓨터가 모든 책상에 놓여 있던 시대도 아니었다. 타자기와 워드프로세서, 컴퓨터가 함께 존재하던 과도기였다.
그 무렵에는 금성소프트웨어의 하나워드를 비롯한 DOS 기반 워드프로세서가 하나둘 보급되기 시작했다. 나 역시 하나워드로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검은 화면에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도스(DOS) 명령어를 입력하고 문서를 작성했다. 지금처럼 마우스를 사용하는 환경도 아니었고, 저장을 잘못하면 애써 작성한 문서가 한순간에 사라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수정액을 들고 처음부터 다시 타이핑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것은 혁명과 같은 변화였다.
배경은 바뀌었지만 문서는 여전히 사람의 손에서 완성됐다. 초안은 손글씨로 작성하는 일이 많았고, 결재를 올리면 상급자는 빨간 펜으로 문장을 고치고 표현을 다듬었다. 결재판이 돌아오면 문서는 빨간 글씨로 가득했다. 맞춤법 하나, 조사 하나, 문장 순서 하나까지 꼼꼼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그때는 빨간 글씨가 많을수록 부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것은 질책이 아니라 배움이었다. 선배들은 문서를 단순히 수정한 것이 아니라 행정문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몸으로 가르쳐 주고 있었던 것이다.
도구는 바뀌어도 무게는 그대로
이후 아래아한글이 보급되면서 문서 작성 방식은 또 한 번 크게 바뀌었다. 수정액도, 먹지도, 여러 장의 사본도 하나둘 사라졌다. 컴퓨터는 공직자의 필수 도구가 되었고, 전자결재는 종이문서를 빠르게 대체했다.
그리고 지금은 AI에게 초안을 부탁하는 시대가 되었다. 공소장을 타이핑하던 타자기에서 시작해 DOS 기반 하나워드, 아래아한글, 전자결재를 거쳐 AI까지 불과 40여 년 만에 문서를 만드는 도구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달라졌다. 도구는 가벼워졌지만, 그 도구가 짊어진 행정의 무게는 결코 가벼워지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바뀐 것은 도구였을 뿐이다. 문서를 쓰기 전에 생각하고, 정확한 표현을 고민하고, 한 문장이 누군가에게 미칠 영향을 책임지는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의 몫이다.
가끔은 그 묵직한 타자기의 타격감이 문득 떠오른다.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한 글자 한 글자를 신중하게 눌러 쓰던 그 시절의 마음만큼은 지금도 잊지 말아야 할 공직자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출처 인천in 칼럼 · 2026-07-03
필자 김철환 / 더원(TOAA) 대표